dbNavi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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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15년 당시의 개성 읍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의 1남 3녀 중 막내로 자라며 부족한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호수돈 보통학교와 호수돈 여고를 다녔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소녀답지 않게 하모니카 불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야단도 더러 맞았던 것 같다. 영어를 남보다 잘했고, 문학에도 취미가 있어 세계명작들도 열심히 구해 읽었다. 자수에는 취미가 있었으나 이것을 내 평생의 업으로 삼으리라고는 당시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내놓고 보니 이 시절이 나에게 남겨준 것은 첫째는 문학소녀로서 넓은 세계에 대한 꿈과 호기심을 키웠다는 것이고, 둘째는 개성사람의 자존심과 기질을 몸으로 익히고 그 가치에 대한 믿음을 평생 지닐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여고를 졸업하며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전 영문과 예과에 입학했다. 서울의 생활이 개성에 비해 낯설고 폭이 넓게 느껴졌지만 나는 왠지 무언가 다른 더 넓고 큰 세상으로 가야할 것같은 공상에 잠기곤 했다.
마침 이종사촌언니가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방학 때 고향을 찾은 언니에게 동경유학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도움을 청했다. 집안에서는 어린 딸을 멀리 떠나 보낸다는 것이 불안하여 동경 유학을 반대하셨으나 한번 마음먹으며 꼭 해내야 하는 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예과 1년을 마치면서 동경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대학을 선택한 것도 사범과 자수부를 선택한 것도 언니의 조언에 따라서였다.
내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이 시절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 밖에 몰랐던 시절, 유일한 한국 여자기숙생으로 일본 학생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마치 종교에 함몰하듯 섬세하고 윤기나는 실과 바늘 끝에 온 정성을 쏟아 자수판을 메꾸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별세계를 체험 할 수 있었고 다 놓아진 수를 놓고 이를 음미해보며 나의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을 하던 동안에는 호수돈여고 시절부터 배워온 하와이안 기타를 즐겨 타면서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도 했는데 나보다 늦게 유학 온 박민종씨(후에 경희대 학장 역임)가 바이올린을 진홍섭 선생(후에 이화여대 박물관장 역임)이 내 방으로 기타를 가지고 와서 삼중주를 맞추어 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1937년,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일본국 문부성에서 주는 자수편물 교원자격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귀국 이듬해인 1938년 나는 모교인 호수돈 여고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나는 무엇이든 한번하면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 가르치는 일에도 온 정성을 쏟았다. 학생들은 나를 친언니처럼 잘 따랐다. 그래서인지 그 해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작품공모전에 네 명의 학생이 출품해서 네 명 전원이 특선을 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것이 나의 작품활동에도 큰 용기를 주어 같은 해 열린 조선미술전에서 나의 작품 '국화와 원앙'이 입선을 하는 영예를 안게되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참 복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여성에게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예술세계에 심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 일년만에 일어났으니 그 당시 젊은 나이로서 마치 양어깨에 날개를 단 것 같은 기분이었다.